[Why]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자연주의' ES클럽리조트 '괴짜 회장' 이종용 "2500만달러?글쎄 땅 안판다니까···그래나 미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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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10.05.29(토) 2010-05-29조회수 : 932 |
"2500만달러?글쎄 땅 안판다니까···그래나 미쳤다" "45세는 넘어야 남자지···네팔·피지 이어 뉴질랜드·알래스카까지··· 나가자, 쳐들어가자!" 멀리 월악(月嶽)이 청풍호(淸風湖)에 제 얼굴을 비추고 있다. 뒤는 해발 1015m 금수산이다. 누운 미녀 형상을 닮아 미녀봉이라 불리는 그 산이다. 거기 파묻힌 ES클럽리조트는 인간이 만든 게 아닌 거대한 자연의 일부 같았다. 방 한가운데 암반(岩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바닥 뚫고 나온 소나무는 천장 뚫고 하늘로 솟아있다.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 파헤치지 않은 객실들이다. 번잡한 놀이시설은커녕 고기 냄새 풍기는 음식점도 찾아보기 힘들다. 폭우 요란한 날 들판 가운데 파라솔이 펼쳐져있었다. 머리가 비바람 속에 만날 괴인(怪人)을 더듬는데 몸은 사정없이 떨려왔다. 그때 이종용(李鐘龍·68) 회장이 나타나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왜 거기서 떠시오? 안으로 갑시다."
▲ '늙은 프론티어' 이종용이 말했다.“ 땅콩농사 지었을 때가 제일 행복했다. 자연은 거짓말하지 않거든.”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1976년 여름 그날 이종용은 냉(冷)막걸리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충북 제천의 구멍가게 앞이었다. 달랑 지도 한장 들고 이 부근을 헤맨 게 2년째였다. 선후배 열댓 가구가 모여 살 협업(協業)농장 부지, 바로 그가 찾고 있는 것이었다. 근처 사는 이장(里長)이 주변을 어슬렁댔다. "막걸리 한잔 하소!" 이종용의 말에 이장이 물었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오, 탐석(探石)하고 다니나?"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장이 탁배기잔을 턱 놓더니 말했다. "알아보고 연락주겠소!" 노모(老母)가 담석수술 후유증으로 세상 뜨기 이틀 전이었다. "괜찮은 땅이 나왔다"는 전화가 왔지만 상(喪)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석 달이 지나서야 이장이 생각났다. 현장에 가봤다. 충주댐 건설이 시작된다는 말이 들려왔다. 바위투성이 8만7000평 부지였다. 그 앞 150m까지 물이 찬 광경이 그려졌다. 평당 30원씩 270만원, 두말 않고 현금을 치렀다. 16평짜리 서울 반포아파트 한 채 값이었다. 이종용이 말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라 생각했다." 땅콩농장 ―왜 제천입니까. "고향이 경북 왜관입니다만 주로 대구와 서울에서 일을 했습니다. 두 도시 중간쯤 되는 곳이 어딜까 궁리하다 컴퍼스로 재봤지요. 여기였어요." ―이 땅을 평당 30원에 샀으니…, 대박을 쳤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제게 땅 판 분이 조금 비싸게 불렀대요. 흥정했으면 더 싸게 살 수 있었겠지. 전 두말하지 않았어요. 땅 판 분이 주민들에게 항의를 받았대요. '제 욕심 차리려 값을 잔뜩 올려놔 우리 땅 안 팔리게 생겼다'고." ―34년 전이면 무인지경(無人之境)이었겠습니다. "땅을 볼 때 경치(View)를 제일로 칩니다. 정면이 월악, 뒤가 금수산입니다. 댐 생기기 전이었으니 남들 눈엔 버려진 악산(惡山) 같았겠지요." ―땅 보는 건 땅콩농장하면서 배웠나요. "선친이 왜관에서 기와공장을 했습니다. 6·25 때 융단폭격으로 폐허가 됐어요. 대신 마련한 게 낙동강변 땅콩농장이었습니다." ―장남이 아닌데 왜 가업(家業)을 넷째가 잇습니까. "제가 5남매 가운데 끝에서 두 번쨉니다. 부모들은 원래 큰아들을 가장 신뢰하지요. 애정은 막내에게 제일 많이 주고. 중간에 낀 전 별 볼 일 없는 존재였어요. 그러니 땅콩농사라도 해야지요." ―사회학(경북대)을 전공했다면서 농사짓는 게 답답하지 않았나요. "1만4000평쯤 됐는데 태풍으로 엉망이 됐어요. 나중에 복구작업한다며 제방을 쌓는데 하필이면 그게 농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른 겁니다. 농장이 못 쓸 땅이 돼 3년 만에 접었어요. 전 지금도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생각합니다." ―농사짓는 게 왜 행복한가요.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요. 제때 비와야 하고 기온도 적절해야 합니다. 사람이 시기 맞춰 파종(播種)하고 거름 주고 김 매줘야 제때 수확할 수 있지요. 1년 땅콩 소출이 600가마쯤 됐어요. 농사 때문만은 아니고 대륜고 다닐 때부터 산을 좋아했어요. 곤욕도 치렀지만." ―산 타면서 곤욕은 왜 치릅니까. "생김새 때문인지 공비(共匪)로 오해받은 적이 많아요. 전북 부안 적벽강 부근에서 스케치를 할 때였어요. 느낌이 이상해 고개 들어보니 초등학교 3~4학년쯤 되는 아이 열댓 명이 절 둘러싸고 있어요. 손엔 돌멩이를 들고. 한 아이가 이러더군요. '아저씨, 간첩이지? 꼼짝하지 마!'" ―혼내주지 그랬습니까. "어린애들이라도 혼자 열댓 명을 어떻게 이깁니까. 경찰관 3명이 오더군요. 스케치하는 게 간첩 상륙 루트 그리는 것 같았대요. 당시 간첩들이 서해안으로 많이 침투했거든요. 대구 비슬산에선 더 황당한 일도 당했어요." ―더 황당한 일?. "친구 둘과 셋이 산을 타고 있었어요. 전 앞서 가는데 두 녀석이 아낙네들에게 실없는 소릴 했어요. '소백산에서 오는 길인데 다음엔 지리산을 치자'고. 그들이 달성경찰서에 신고했어요. 유가사 산문(山門) 앞에서 계속 등산할지 말지 의논하는데 핫바지 입은 사람 둘이 접근하는 겁니다. 자세히 보니 권총이 반짝거려요. 주변에선 카빈소총 든 경찰 30명이 저흴 포위하고 있었고요." ―땅콩농장 접은 뒤 섬유업을 했지요? "협창실업이라는 섬유유통업체의 대구 출장소에 취직했지요. 정식 직원도 아니었습니다."
▲ ‘비 오는 날 뼈마디가 쑤셔오는 이 나이에 더 벌어봤자 뭐하겠느냐마는, 45세는 넘어야 진짜 인생이지. 꽃이 진다고 해서 마음까지 시들진 않는다. 앞으로도 갈 길을 가겠다. 나가자! 쳐들어가자!’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 #1996년 서울시청 앞 5만평을 더 사는데 6000만원이 들었다. 충주댐이 들어서더니 관광숙박지구가 됐다. 땅값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굴지의 대기업 두곳이 그 땅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외화가 필요하면 당시 환율로 2500만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두 회사 관계자를 불렀다. '혹시나!'하고 찾아온 그들에게 이종용은 선언했다. "나, 투기하려고 땅 산 것 아니다. 팔 생각 없으니 연락하지 마라!" 실망한 그들이 돌아간 뒤 그는 무교동 거리를 헤매며 대낮부터 대취(大醉)해버렸다. 서울시청 앞 보도에 덜렁 누워버린 이종용이 외쳤다. "아버지께 단돈 9만원 받아 사회로 나왔다. 호주머니에 2500만달러 넣어봤으니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성공한 인생이다. 평생 죽어도 못쓸 돈 만져봤으니 이제 돈 생각 끝!" 이종용이 말했다. "시골 땅으로 돈 버는 건 개발도상국에서나 있는 일입니다. 그 혜택을 환원시킬 생각을 했습니다. 망해도 먹고살 돈은 남기겠다 싶었죠." 행인들이 '미쳐도 저렇게 미칠 수가…'하는 표정으로 곁을 지나갔다.
한여름밤의 꿈 ―농부에서 회사원이 되면 목표가 어떻게 바뀝니까. "취직하니 아버지가 9만원을 주셨어요. 그걸로 부모와 막냇동생 명의로 10만원짜리 적금 세 개를 가입해 붓기 시작했어요. 월급이 5000원이었는데 얼마 안 가 이대론 안 되겠다 싶더군요. 부업(副業)을 찾았지요. 당시 대구엔 섬유 원사(原絲) 공급상이 많았어요. 원·부자재를 공급해주거나 회사를 연결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겨우 적금을 다 부었는데…, 세상은 절대 그냥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뭔가 기연(奇緣)이 있었군요. "적금 30만원을 찾았을 때 섬유업계 원로께서 소장을 찾았어요. '안 계시다'고 하니 대뜸 '돈 몇십만원 융통할 데가 없느냐'고 묻는 거예요. '30만원이 있습니다'라고 하니 가져오래요. '육백(六百)'을 치다 밑천이 달린 겁니다." ―노름 밑천을 대준 겁니까? "다음 날 새벽 그 영감이 자기 집으로 오래요. '소장 모르게 30만원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이러더군요. 하루 이자 5만원 쳐줄 테니 35만원짜리 당좌수표를 받아갈래, 아니면 그 돈 내게 맡기고 매달 이자로 5만원씩 받아갈래?" ―어떤 쪽을 택했습니까. "당연히 후자(後者)지요. 그런 고리(高利)를 준다는 건 절 잘 본 거잖아요. 그 정도면 100만원짜리 적금도 부을 수가 있겠다 싶었어요. 회사에서 월급도 올랐고 부업도 제법 탄력이 붙었을 때인데 또 운(運)이 바뀐 겁니다." ―뭡니까, 이번엔. "협창실업이 흥한이라는 회사를 인수하려 했어요. 나중에 원진레이온이 된 그 회사는 재벌이었던 박흥식씨 소유였어요. 협창은 이북사람들이 만든 회사예요. 직원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라 술 담배를 할 줄 몰랐어요. 회사에선 로비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다 절 주목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왔군요. "올라가기 싫다고 했어요. 협창에선 별의별 조건을 다 제시했어요. 이사비에 과장 자리까지. 역제의를 했습니다. 흥한과 협상할 때 전권(全權)을 달라, 술값·영업비 결재받아 쓰기 싫으니 알아서 쓰게 해달라, 석 달만 일하겠다. 명동 사보이호텔에 방 한 칸 잡아달라, 이렇게요." ―사보이호텔? "놀랐을 거예요. 새카만 촌놈이 사보이호텔에서 묵게 해 달라고 했으니. 그런데도 다 들어줬어요. 그때 제가 처음 한 일이 뭔 줄 압니까?" ―뭡니까. "일제 도시바TV 다섯대를 사 흥한 간부들에게 선물한 겁니다. 협창 임원들이 깜짝 놀랐을 거예요. 처음 저지른 게 그 비싼 일제 TV를 다섯대나 산 거니까요." ―효과가 있었습니까. "만점이었지요. 게다가 매일 사장 차(車) 밖에 대기시켜놓고 명동에서 코가 삐뚤어지게 술 마셨어요. 호텔방에서 늘어지게 잠자다 저녁에 술 마시는 게 일이었지만 고급 정보가 쏙쏙 들어왔습니다. 회사 매출도 올랐고요." ―그래 흥한은 인수했나요. "박흥식씨가 부도가 나자 흥한이 산업은행에 넘어갔습니다. 1~3차 낙찰에서 유찰되면 수의계약을 할 수 있었는데 마지막 3차 낙찰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생겼어요." ―뭔가 잘못됐군요. "3차 낙찰 날이 토요일인데 마감시간 직전 누군가 보증금을 넣은 겁니다. 아무도 없는 회사에서 빈둥대고 있는데 흥한 쪽에서 '큰일났다'는 연락이 왔어요. 사장도, 전무도, 담당 이사도 없었습니다. 결국 응찰을 못했지요." #1998년 3월 리조트 개발이 본격화될 때 IMF가 터졌다. 빚 얻은 32억원에 매달 붙는 이자만 4부 8리였다. 돈 빌릴 곳 없는 사업가의 애가 타들어갔다. 서울 서초동 60평 아파트를 헐값에 매각했다. 겨우 한 달 반 이자 버틸 수 있는 돈이 마련됐다. 그가 고전한다는 소식을 들은 한 신문사 선배가 그를 불렀다. "전면광고라도 내보지, 그래." "돈 없습니다." "콘도 분양권 대신 내면 되잖아." 그러자고 마음먹은 뒤 회사로 돌아오며 이종용은 직원들도 깜짝 놀랄 아이디어를 냈다. '분양가 10%인상, 45세 이상만 가능!' '참새가 죽어도 짹한다'는 심정이었다. 광고나간 날 아침 분당 집부터 계속 회사 전화가 불통(不通)됐다. 서울 오는 고개 위에서 겨우 연결된 여직원이 이리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바빠요!" 이종용의 가슴이 철렁했다. "아! 부도났구나." 그런데 회사에 와보니 직원들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전화만 1000통이 넘게 왔고 성급한 이들은 회사로 찾아왔다. 하루에 32억 빚을 다 갚았다. 인생 역전(逆轉), 이런 것이었다.
귀퉁배기 ―낙찰에 실패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정권과 연관된 사람이 있었는데 스파이를 심어놓고 우리 동정을 훤히 꿰고 있었던 거지요. 그러다 막판에 허를 찌른 거고." ―사보이호텔에서 쫓겨났겠군요. "회사에서 청계천에 서울총판을 만들었어요. 전 미아리에 방 하나 얻어 출퇴근했고요. 분을 참을 수 없었어요. 그 녀석을 없애버릴까, 청와대 앞에서 분신이라도 할까 별 생각을 다하는데 모시던 상사가 북악스카이웨이로 절 데려갔어요. 와세다대를 나온 그분은 육군 중령 출신이었어요." ―북악스카이웨이에서 뭘 했습니까. "팔각정에 올라가더니 '협창실업이 어디 있나 찾아보라'는 겁니다. 안 보이더군요. 다음엔 '네가 죽이려 하는 사람 집 찾아보라'는 겁니다. 보일 리가 있나요. 그때 갑자기 '임마! 이렇게 하찮은 인간들 때문에 목숨을 걸려고 해? 너, 인간이 그것밖에 안 돼? 차렷!'이라고 하더군요." ―차렷? "귀퉁배기를 세대나 갈기더군요. 별이 번쩍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아! 내가 눈에 뵈지도 않는 자에게 인생을 걸 뻔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차리고 난 다음엔요. "갓 결혼해 첫딸을 낳았을 땝니다. 아이 백일(百日)날 술 한잔 거나하게 마시고 집에 들어갔어요. 자는 아이가 이렇게 묻는 것 같았어요. '아빠, 날 어떻게 키웠노'. 농장할 때 생각이 났습니다. 그 시절이 제일 행복했구나 하는. 사실 우리 세대는 상업을 높이 치지 않잖아요. 회사를 차린 건 우연한 일 때문이었어요." ―무슨 우연이 그리 많습니까. "1974년에 회사 그만두고 사무실 하나 얻었습니다. 1년쯤 놀고 나니 돈이 바닥났어요. 거리에서 흥한에 있던 판매촉진과장을 만났어요. 티셔츠, 메리야스가 전망이 밝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되겠다' 싶어 여기저기 돈 빌려 4500만원을 만들었지요. 그때 섬유업체들은 일본기계를 모방했는데 제품이 엉망이었습니다. 일본서 기계를 수입하려면 쿼터를 따야했는데 제가 5대 들여 올 권리를 얻었지요." ―그래서 만든 게 장안섬유지요. "장안(長安)이란 이름은 아버지가 늘 하신 말씀에서 따온 겁니다. 한학에 조예가 깊으셨는데 '장안종성노룡성(長安鐘聲老龍聲)'이라는 말에서 저희 형제 이름을 다 지었거든요. 4500만원으론 공장 사고 기계를 두대 들여오거나, 공장을 세 얻는 대신 기계를 다섯대 들여올 수 있었어요." ―어떻게 했습니까.
"문형한테 이 얘긴 꼭 하고 싶어요. 다섯살, 열살 위 선배를 몇 분이라도 알고 지내라고요. 세상이 다 인간관계잖아요. 한 선배가 이러는 겁니다. '빙신아. 셋방에서 공장하다 갑자기 옮기라고 하면 어떻게 할래? 기계 움직이면 다 망가지는 거 아니냐. 땅 사면 대출을 받을 수 있잖아, 기계는 안되지만 부동산은 담보가 되잖아. 사업해 성공할 자신 없어? 있으면 적당한 빚은 져도 된다'고요." ―그래서 구로공단에…. "170평에 건평이 80평이었습니다. 거기 기계 두대를 들여놓으니 시직(試織)해볼 돈도 없었어요.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어요. 아는 분이 '너 기계 들여놨다는데 시험제작해봤느냐'고. 해보니 아주 좋은 제품이 나왔어요. 그분이 다시 조건을 걸더군요. 돈 빌려 줄 테니 나머지 기계 3대도 들여와라. 대신 우리 일만 해서 나중에 갚으라고요." ―구세주 맞네요. "그날부터 24시간을 풀가동했어요. 1년 반 만에 빚을 다 갚고도 현금이 1000만원이 생겼습니다. 제천 땅을 바로 그 돈으로 산 겁니다. 그때 마침 제가 대만 출장을 자주 다녔습니다." ―뭘 봤습니까. "당시 그 나라엔 중소기업만 1만8000개가 넘었어요. 대부분 섬유 같은 경공업이었는데 이미 중국 본토(本土)에 진출하고 있었지요. 섬유산업에 대해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 클럽ES 리조트는 자연을 해치지 않고 그대 로 설계했다. 객실 안에 바위와 소나무가 솟아있다.
나가자! 쳐들어가자! ―그래서 어떻게 결정했습니까. "때마침 도시에 싫증이 났어요. 농장 하던 생각이 자꾸 났습니다. 한려수도 옆이 괜찮다 싶어 거제도 최남단에 농장 부지 1만5000평을 샀지요. 당시 서울~거제 가는 데 20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계속 그곳을 가는 거예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런 게 일탈(逸脫) 현상이지요. 왜 그리 고생스러운 길을 자꾸 가는가, 결론은 자연에서 쉬고 싶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땅 사는 것과 개발하는 건 다른데요. "세계인의 60%가 스위스를 제일 가보고 싶어하잖아요.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 식은 자연을 망가뜨리는 것인데 스위스는 자연을 살리더군요. 스위스풍의 샬레라는 가옥도 따지고 보면 우리 화전민들이 짓는 집과 같은 거고요. 그렇게 해보겠다 생각했습니다." ―당시 국내에도 콘도니 뭐니 하는 휴양시설이 많았지요. "이름 대긴 뭐하지만, 전 산에 우뚝 솟은 건물들이 흉물스럽다고 느꼈습니다. 화가, 관광학 배운 후배 여섯명을 모아 3개월을 스터디한 후 말했어요. '환경(Environment)' '우아(Elegant)' '최고(Excellent)'로 '세컨드 하우스(Second House)'와 '사회(Society)'를 만들겠다고. ES클럽이란 말이 거기서 나온 겁니다. 사실 클럽이란 용어를 두고도 반대가 많았어요." ―왜요? "후배들이 '무슨 술집이나 당구장이냐'는 겁니다. 제가 그랬어요. '클럽 메드'도 원래 휴양촌에서 다국적 기업이 된 거 아니냐. 서양에서 '클럽 메드'가 나왔으니 난 동양적인 클럽ES를 만들겠다고 했지요." ―초기에 분양할 때 고전을 했지요. "이 업계는 원래 판매조직이 따로 있습니다. 설악산, 제주도, 경주만 휴양지로 생각했던 시절이니 당연히 '제천이 어디냐' '청풍호가 뭐야'하는 반응이 나왔지요. 그때 나씨라고 판매의 귀재가 부근을 지나다 저희 클럽에 들른 겁니다. 그렇게 해서 개발이 본격화됐는데 이번엔 IMF를 맞은 겁니다."
―막막했겠습니다. "서초동 집 판 뒤 아내와 네팔 트레킹을 갔어요. 제 궁한 사정을 모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이러더군요. '내 서울 가면 파출부 시작할 거야. 아이들은 다 지하철공사장에 내보내고.'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서울로 와 직원들을 모았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시기 잘못 만나 이 고생하지만 소신껏 했고 부끄러운 짓 한 적 없다. 분양권 가격을 30% 인상하고 45세 이하에게는 팔지 마라. 이력서도 받아라'고 지시했어요. 죽을 때 죽더라도 짹 소리는 내야 한다는 심정이었지요. 직원들은 네팔 다녀오더니 돌았다고 했지요. 말리더군요. 그래서 가격은 10%만 인상하고 이력서는 안 받았어요. 연령제한은 그대로 밀어붙였습니다. 돈키호테 같은 발상이지만 불황기라고 수요가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단지 줄어들 뿐이지요. 차별화가 필요한 겁니다." ―연령제한은 왜? "전 남자는 45세 이상이 돼야 남자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가서 쉴 데가 있어요? 문형은 어디서 쉽니까? 차분하게 생각 가다듬을 곳이 국내에 하나쯤은 있어야 하잖아요. 이곳이 267실인데 금·토요일은 하나도 비지 않아요. 지금은 5실밖에 안 차있지요." ―그래서야 손해 보지 않나요? "전 우리나라 콘도, 골프장은 다 심보가 나쁘다고 생각해요. 회원제는 회원만 받아야지요. 돈 3~4배 받고 뒤로 일반인 받으려면 회원권은 왜 팝니까? 내 이 소리 해서 고향에서 왕따당한 적이 있지만 전직 대통령 경호실장이란 사람이 대뜸 전화해 '방 7개 내놓으라'는 걸 일언지하에 거절했어요. 제가 돈 더 벌어 뭐하겠어요, 이 나이에." ―최근 경남 통영에 리조트를 만들었지요? 네팔에도 있고 빈탄, 피지는 땅을 구입했지요. 러시아 캄차카 반도에도 진출할 계획이고. "통영은 김혁규 전 지사가 저희 리조트를 보고 반해 요청해서 만든 겁니다. 이탈리아처럼 만들었는데 건축대상을 탔지요. 우리 회원들은 비행기값만 내면 외국 리조트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요. (갑자기 휴지에 지도를 그리며) 내가 앞으로 이렇게 환태평양 리조트를 만들 겁니다. 과거처럼 총칼로 영토 넓히는 시대는 지났어요. 우리 돈 1억이 동남아에 나가면 8억원의 가치를 지닙니다. 그걸 왜 이 좁은 땅에서 씁니까." 이종용은 석 달 동안 디스크 증세로 활동을 못했다. 그런데 이날은 신들린 사람처럼 웅변을 토해냈다. 때로는 벌떡 일어서기도 했다.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이라 했더니 직원들이 말했다. "저희들끼리 그래요, 고 정주영 회장 닮았다고." "시애틀, 오클랜드, 알래스카에도 만들고…, 호주, 뉴질랜드 북단도 생각하고 있어요. 날 앞으로 '늙은 프론티어'라고 불러주소." 다섯시간째 열변을 뿜던 그는 기자가 주섬주섬 짐을 챙기자 이렇게 외쳤다. "나가자! 쳐들어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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